망양지탄(望洋之歎)맥수지탄(麥秀之歎)
망양지탄(望洋之歎)
望:바랄‧바라볼 망. 洋:바다 양. 之:갈 지. 歎:탄식할‧감탄할 탄.
[참조] 정중지와(井中之蛙). [출전]《莊子》〈秋水篇〉
넓은 바다를 보고 감탄한다는 뜻. 곧 ① 남의 원대함에 감탄하고, 나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 ② 제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
먼 옛날 황하 중류의 맹진(孟津:하남성 내)에 하백(河伯)이라는 하신(河神)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럼,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단 말인고?”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 뜨는 쪽에 북해(北海)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강이 사시 장철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는 실로 황하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 큰 강이 있을까? 어쨌든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황하 중류의 맹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가을이 오자 황하는 연일 쏟아지는 비로 몇 갑절이나 넓어졌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강 하류로 내려가 북해를 한번 보기로 했다. 하백이 북해에 이르자 그곳의 해신(海神)인 약(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진심으로 환영하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은 이제까지 세상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다.
“나는 북해가 크다는 말을 듣고도 이제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의 단견(短見)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북해의 신은 웃으며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였구려. 대해(大海)를 모르면 그대는 식견이 낮은 신으로 끝나 버려 사물의 도리도 모를 뻔했소. 그러나 이제 그대는 거기서 벗어난 것이오.”
맥수지탄(麥秀之歎)
麥:보리 맥. 秀:빼어날‧팰 수. 之:갈 지. 歎:탄식할‧감탄할 탄.
[원말] 서리맥수지탄(黍離麥秀之歎).
[동의어] 맥수서유(麥秀黍油). 맥수지시(麥秀之詩).
[참조] 은감불원(殷鑑不遠). 주지육림(酒池肉林).
[출전]《史記》〈宋微子世家〉.《詩經》〈王風篇〉
보리 이삭이 무성함을 탄식한다는 뜻. 곧 고국이 멸망한 탄식.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은(殷)나라 주왕이 음락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한 신하 중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三公:왕을 보좌하던 세 제후)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훗날의 주문왕(周文王)]의 아들 발(發)에게 주살(誅殺)당하고 천하는 주왕조(周王朝)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무왕(武王) 발은 은왕조의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미자를 송왕(宋王)으로 봉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한 기자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麥秀漸漸兮(맥수점점혜)]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禾黍油油兮(화서유유혜)]
교활한 저 철부지(주왕)가 [彼狡童兮(피교동해)]
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不與我好兮(불여아호혜)]
[주] 기자 동래설(箕子東來說):기자는 주왕의 횡포를 피하여, 혹은 주나라 무왕이 조선왕으로 책봉함에 따라 조선에 들어와 예의‧밭갈이‧누에치기‧베짜기와 사회 교화(敎化)를 위한 팔조지교(八條之敎)를 가르쳤다고 하나 이는 후세 사람들에 의한 조작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라고 함. 왜냐하면 진(晉)나라의 무장(武將)‧정치가‧학자인 두예(杜預:222~284)가 그의 저서《춘추석례(春秋釋例)》의 주(註)에서 “기자의 무덤이 양(梁)나라의 몽현(夢縣)에 있다”고 적고 있는 만큼 ‘기자 동래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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